대학 입시에서 정시 모집 비율을 확대하는 것이 공정한가?
개회 발언
찬성 측 개회 발언
존경하는 심사위원님, 그리고 오늘 이 자리를 함께하는 모든 분들께 묻겠습니다.
“누구나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다면, 그 경주는 공정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팀은 대학 입시에서 정시 모집 비율을 확대하는 것이 더 공정하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공정은 ‘모두에게 똑같은 기준’을 제공하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첫째, 수시 제도는 정보와 자원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장치가 되고 있습니다. 자기소개서, 비교과 활동, 추천서—이 모든 것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직결됩니다. 서울 강남의 학생은 국제봉사와 해외연수로 스펙을 쌓지만, 전남의 시골 학생은 그런 정보조차 접하기 어렵습니다. 이건 ‘기회 균등’이 아니라 ‘기회 차별’입니다.
둘째, 정시는 유일하게 투명하고 객관적인 평가 기준입니다. 수능은 누구나 같은 날, 같은 문제, 같은 채점 기준으로 평가받습니다. 사교육이 영향을 미친다고요? 그렇다면 수시의 면접 코칭, 포트폴리오 컨설팅은 더 큰 사교육 시장입니다. 오히려 정시는 ‘돈이 아닌 노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셋째, 정시 확대는 학생들이 본질적인 학업에 집중하도록 유도합니다. 지금처럼 수시 중심의 입시는 학생들을 ‘스펙 수집가’로 만들고, 교실은 ‘입시 포트폴리오 제작소’로 전락합니다. 반면 정시는 교과 내용에 충실하게 공부하는 태도를 장려하며, 교육의 본질을 회복시킵니다.
마지막으로, 정시는 지역·계층 간 격차를 줄이는 실질적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정시 비중이 높은 의대·법대에서 지방 출신 합격자의 비율이 오히려 더 높습니다. 왜요? 그들은 사교육 없이도 ‘공부’ 하나로 승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꿈을 좇는 길에 특권이 앞서선 안 됩니다.
진정한 공정은, 아무리 가난해도 책 한 권 들고 시험장에 들어설 수 있는 그 가능성 속에 있습니다.
반대 측 개회 발언
감사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질문 드리겠습니다:
“시험지 위의 답이, 인간의 가치를 전부 말해줄 수 있을까요?”
우리 팀은 대학 입시에서 정시 모집 비율을 확대하는 것이 결코 공정하지 않다고 단호히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공정은 ‘다양한 사람을 다양한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정시는 표면적 공정 뒤에 실질적 불평등을 숨깁니다. 수능 점수 하나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면, 서울 대치동의 학원가에서 매일 10시간씩 문제를 푸는 학생과, 방과 후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돕는 학생이 과연 같은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을까요? 정시는 ‘노력’을 존중한다지만, 그 ‘노력’ 자체가 이미 불평등한 출발선 위에 서 있습니다.
둘째, 정시는 인간을 숫자로 환원시키는 비인간적 평가입니다. 창의성, 협업 능력, 사회적 감수성—이러한 역량은 수능으로 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직 국어·수학·영어 점수만으로 한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려 합니다. 이건 교육이 아니라 ‘분류’입니다.
셋째, 정시 중심 입시는 교육 현장을 더욱 왜곡시킵니다. 학교는 학생을 키우는 곳이 아니라, ‘수능 기계’를 양산하는 공장이 됩니다. 교사는 가르치지 않고, 학생은 배우지 않습니다. 오직 ‘빨리 푸는 법’만 가르치고, ‘틀리지 않는 법’만 익힙니다. 이런 교육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을까요?
넷째, 정시 확대는 오히려 사교육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킵니다. 수시는 다양한 활동을 요구하지만, 정시는 오직 ‘점수’만 요구합니다. 그 결과, 학부모들은 더 비싼 학원, 더 많은 문제집, 더 긴 학습 시간을 선택합니다. OECD 국가 중 사교육비가 가장 높은 나라가 어딘지 아십니까? 바로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공정은 단일한 기준이 아닙니다.
공정은 다른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빛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 길을 정시 하나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개회 발언 반박
찬성 측 두 번째 발언자 반박
존경하는 심사위원님, 방금 반대 측은 “정시는 인간을 숫자로 환원한다”며 감성적인 어조로 우리를 설득하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감동적인 이야기가 곧 타당한 논증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이상적인 교육’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가장 덜 불공정한 제도입니다.
첫째, 반대 측은 “정시가 사교육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킨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OECD 사교육비 1위라는 통계는 사실이지만, 그 원인이 정시 때문이라는 건 인과관계의 심각한 오류입니다.
오히려 수시 확대로 인해 생긴 ‘스펙 레이스’가 사교육 시장을 더욱 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국제봉사 콘설팅 500만 원, 자기소개서 첨삭 100만 원, 면접 특강 월 80만 원—이 모든 게 누굴 위한 것입니까?
정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유일한 무대입니다. 수능 문제는 아무리 부자라도 미리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반대 측은 그마저도 포기하라고 하십니까?
둘째, “인간을 숫자로 환원한다”는 비판은 아름답지만 현실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대학은 무한한 인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제한된 자리에 수십만 명이 지원할 때, 우리는 투명하고 검증 가능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수시의 ‘창의성’, ‘사회적 감수성’ 평가가 얼마나 객관적입니까?
같은 포트폴리오를 두고 A교는 ‘열정적’이라 하고, B교는 ‘비체계적’이라 평가합니다. 이건 평가가 아니라 주관의 전시장입니다.
정시는 완벽하지 않지만, 최소한 누가 봐도 같은 점수를 받는 유일한 제도입니다.
셋째, 반대 측은 “정시가 교육을 왜곡시킨다”고 하셨지만, 실제로 교실을 망가뜨리는 건 수시입니다.
지금 고등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수업을 듣지 않습니다.
“이거 대학 가는데 도움 돼요?”라는 질문이 교사에게 가장 많이 들어오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수시는 교과 성적뿐 아니라, 동아리, 봉사, 대회, 에세이까지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학생들은 진짜 배움보다 입시용 포트폴리오 조립에 매달립니다.
정시는 오히려 학생들을 그런 피로한 스펙 전쟁에서 해방시켜, 책상 앞에 앉아 진짜 공부에 집중하도록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반대 측은 “출발선이 다르니 정시는 불공정하다”고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출발선은 다릅니다.
하지만 그 차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정시입니다.
왜냐하면 정시는 부모의 직업, 지역, 재산과 무관하게, 책 한 권과 연필 하나로 승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회마저 빼앗는다면, 우리 사회는 영원히 계층의 벽에 갇힐 것입니다.
반대 측 두 번째 발언자 반박
감사합니다.
찬성 측은 “정시는 공정하다”며 마치 수능이 신성불가침한 성배인 양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성배 안에는 이미 특권의 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첫째, 찬성 측은 “수시는 정보와 자원의 불평등을 정당화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시는 무엇입니까?
통계청과 한국교육개발원 자료에 따르면, 수능 성적 상위 10% 학생 중 68%가 서울·경기 출신이며, 이들 중 82%가 월 50만 원 이상 사교육을 받습니다.
반면 전남·강원의 학생들은 평균 사교육비가 15만 원에도 못 미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시는 노력만 있으면 된다”는 주장은 현실을 외면한 자기최면입니다.
노력도 자원이 필요합니다. 시간도, 정신적 여유도, 튜터도 모두 자원입니다.
둘째, 찬성 측은 “정시는 투명하고 객관적”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하지만 투명함과 공정함은 다릅니다.
감옥도 투명합니다. 규칙도 명확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의로운가요?
수능은 암기와 스피드, 실수 방지 능력을 평가할 뿐, 사고력, 비판적 탐구, 협업 능력은 전혀 보지 않습니다.
이런 평가로 미래의 의사, 법조인, 연구자를 뽑는다는 게 과연 국가의 미래를 위한 선택입니까?
더군다나 최근 교육과정은 핵심역량 중심으로 바뀌었는데, 정시는 여전히 1980년대식 지식 암기 시험입니다.
이게 교육의 본질 회복입니까? 아니면 과거에 갇힌 환상입니까?
셋째, 찬성 측은 “의대·법대에서 지방 출신 비율이 높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통계는 지역인재 전형, 농어촌 특별전형 등 수시 요소가 혼합된 결과입니다.
순수 정시만으로 뽑힌 합격자만 따지면, 오히려 수도권 출신 비율이 급증합니다.
이는 인과관계를 혼동한 전형적인 오류입니다.
마치 “우산을 쓰는 날 비가 온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넷째, 찬성 측은 “정시 확대가 학업 집중을 유도한다”고 하셨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정시 중심 교육은 학생들을 문제 풀이 로봇으로 만듭니다.
‘왜 이 공식이 성립하는가’보다 ‘어떻게 빨리 푸는가’가 중요해지고,
‘이 역사 사건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가’보다 ‘몇 페이지에 나왔는가’가 질문됩니다.
이게 진짜 배움입니까?
아니면 시험 기술 훈련입니까?
공정은 단일 기준이 아닙니다.
공정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꽃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정시 확대는 그 길을 하나로 몰아넣는 폭력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미래를 다섯 과목의 점수로 압축해서는 안 됩니다.
질의응답
찬성 측 세 번째 발언자 질의
[찬성 측 3번]
반대 측 1번 발언자님께 묻겠습니다.
귀측은 “정시는 인간을 숫자로 환원한다”며 비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수시에서 평가하는 ‘창의성’이나 ‘사회적 감수성’은 어떻게 객관적으로 측정됩니까?
특히, 같은 학생이 A대학에서는 ‘열정적 리더십’으로 평가받고, B대학에서는 ‘비체계적 활동’으로 평가받는 사례가 다수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는 오히려 평가자의 주관과 편견이 개입될 여지가 더 크지 않습니까?[반대 측 1번]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는 수시가 완벽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양한 평가 도구를 조합함으로써 한 사람의 전체상을 가늠하려는 시도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포트폴리오에는 학생의 성장 과정, 실패 후의 회복력, 지역사회 기여 등이 담깁니다.
이는 수능 점수 하나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차원입니다.
물론 주관적 요소가 있을 수 있으나, 다수의 평가자와 루브릭 기반 채점으로 최소화하고 있으며, 이는 정시처럼 단일 지표에 의존하는 것보다 총체적으로 더 인간적인 접근입니다.
[찬성 측 3번]
반대 측 2번 발언자님께 묻겠습니다.
귀측은 “정시는 특권의 물이 가득한 성배”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런데 수시에서 요구되는 국제봉사, 해외연수, 연구 프로젝트는 오히려 더 고비용·고정보의 활동 아닙니까?
예를 들어, 필리핀에서 2주간 봉사활동을 다녀오는 데 300만 원이 든다고 할 때,
이를 감당할 수 없는 학생은 ‘사회적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평가당하는 건가요?
수시야말로 특권층에게 유리한 제도 아닌가요?[반대 측 2번]
그 점은 인정합니다. 일부 수시 활동은 사교육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시는 선택지가 다양하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학생은 국제봉사를 하지 않아도, 지역 어르신 돕기, 학교 내 동아리 운영, 온라인 교육 콘텐츠 제작 등 자신의 환경에서 가능한 방식으로 역량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정시는 오직 한 가지 길—수능 점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마저도 사교육 없이는 걷기 어렵다는 걸 귀측도 알고 계실 겁니다.
[찬성 측 3번]
반대 측 4번 발언자님께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귀측은 “공정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꽃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시 확대가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기회를 제공하는 ‘최소한의 공정’을 보장한다는 점은 인정하시겠습니까?
즉, 아무리 가난해도, 아무리 시골에 살아도, 시험장 문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실 수 있겠습니까?[반대 측 4번]
시험장 문 앞에서는 평등할지 몰라도,
그 문까지 오는 길은 이미 불평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정은 출발선이 아니라 도달 가능성에 관한 것입니다.
가난한 학생이 연필 하나 들고 시험장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그가 서울 학생과 같은 수준의 문제 해결력을 갖췄다고 보시는 건가요?
형식적 평등은 실질적 불평등을 은폐할 뿐입니다.
찬성 측 질의 요약
반대 측은 수시의 주관성을 “다양성의 대가”로 정당화하셨지만,
실제로는 평가의 불투명성과 특권의 재생산을 방치하고 계십니다.
국제봉사든 지역 봉사든, 결국 ‘스펙’이라는 이름 아래 자원이 투입된 활동만이 가치를 인정받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도달 가능성”을 운운하시면서도,
정시가 제공하는 유일무이한 상향 이동 통로—그것조차도 부정하시는 모습에서,
귀측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공정이 아니라, 특정 계층의 안전장치가 아닐까 의심됩니다.
반대 측 세 번째 발언자 질의
[반대 측 3번]
찬성 측 1번 발언자님께 묻겠습니다.
귀측은 “정시는 누구나 같은 문제로 평가받는 유일한 제도”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수능 문제가 모든 학생의 배경과 경험을 동일하게 반영한다고 보십니까?
예를 들어, ‘서울 강남의 고급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한 독서 지문은,
전남 어촌에서 자란 학생에게도 동일한 이해력을 요구하는 게 과연 공정한가요?[찬성 측 1번]
수능은 지식과 논리적 사고를 평가하는 시험이지, 생활 경험을 평가하는 시험이 아닙니다.
지문 속 배경은 단지 사고의 재료일 뿐이며,
모든 학생은 같은 정보를 바탕으로 추론 능력을 겨룹니다.
오히려 그런 맥락을 모르는 학생이 더 창의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출신이 아니라 사고력입니다.
[반대 측 3번]
찬성 측 2번 발언자님께 묻겠습니다.
귀측은 “정시는 사교육 영향이 적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러나 수능 만점자 중 92%가 사교육을 받았다는 한국교육개발원 2023년 조사 결과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돈으로 살 수 없는 무대”라고 하셨지만,
현실은 돈이 많을수록 더 높은 점수를 얻는 구조 아닙니까?[찬성 측 2번]
그 통계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사교육을 ‘받았다’는 것과 ‘의존했다’는 것은 다릅니다.
많은 학생이 학교 수업 외에 무료 인강, 기출문제, 스터디 그룹 등을 활용합니다.
이를 모두 ‘사교육’으로 묶는 건 개념의 확대 해석입니다.
핵심은, 수능 문제 자체는 사교육 없이도 풀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반면 수시는 컨설팅 없이는 포트폴리오조차 제대로 작성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반대 측 3번]
찬성 측 4번 발언자님께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귀측은 “정시 확대가 교육의 본질을 회복시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OECD 국가 대부분은 표준화 시험 중심 입시에서 벗어나, 포괄적 평가 체제로 전환했습니까?
핀란드, 캐나다, 독일은 모두 학생의 성장 과정과 역량을 중시합니다.
우리만 1980년대식 시험에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과거의 편의를 미래의 공정이라 포장하시는 건 아닌지요?[찬성 측 4번]
OECD 국가들의 사정은 우리와 다릅니다.
핀란드는 인구 500만, 교사의 사회적 지위가 극히 높고,
교육 격차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면 우리는 수도권과 지방,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간 격차가 극심한 분단 사회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덜 부패하고, 가장 검증된 기준이 바로 정시입니다.
우리는 이상을 좇기 전에, 현실에서 누군가의 꿈을 끊임없이 짓밟는 구조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반대 측 질의 요약
찬성 측은 “사고력만 중요하다”며 문화적 배경의 불평등을 외면하셨고,
“무료 인강도 사교육”이라는 현실을 회피하셨습니다.
더욱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을 인정하면서도,
그 해결책으로 더 단순하고 더 잔인한 평가 체제를 제안하시는 모순을 드러내셨습니다.
OECD 국가들이 나아가는 방향은 다양성과 포용인데,
귀측은 과거의 편의를 공정이라 착각하고 계십니다.
진정한 공정은,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빛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정시 확대가 아니라, 수시의 개선과 교육 격차 해소에 있습니다.
자유 토론
[찬성 1번]
방금 반대 측은 “출발선이 다르니 정시는 불공정하다”고 하셨죠? 그런데요, 출발선이 다르다고 해서 경주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출발선 차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무력화하는 게 바로 정시입니다. 왜냐하면 수능은 부모님 직업이나 집 주소를 묻지 않거든요. 책상 앞에 앉은 순간, 모두가 똑같은 문제지를 받습니다. 이게 이상적인가요? 아닙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가장 덜 부패하고, 가장 덜 특권적인 제도라는 점에서, 우리는 정시를 확대해야 합니다.[반대 1번]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똑같은 문제지를 받는다”는 게 정말 공정한가요? 시험 당일 아르바이트로 밤새고 온 학생과, 전문 튜터와 함께 모의고사를 100번 본 학생이 과연 같은 조건입니까?
정시는 형식적 평등의 가면 뒤에 실질적 불평등을 숨깁니다.
더 큰 문제는, 이 제도가 우리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느냐입니다.
“네가 못 들어간 건 네 탓이다” — 이 말이 진짜 공정입니까? 아니면 불평등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폭력입니까?[찬성 2번]
재미있는 말씀이네요. 그런데 반대 측은 수시가 그 ‘폭력’을 해결한다고 보십니까?
오히려 수시는 특권을 더욱 정교하게 포장합니다.
‘국제봉사’라니요? 필리핀에서 3일간 아이들에게 색칠 놀이 가르친 걸 ‘글로벌 리더십’이라 부르는 게 공정합니까?
그런 활동 하나 하려면 최소 300만 원이 듭니다.
정시는 적어도 돈으로 살 수 없는 마지막 성채입니다.
그 성채마저 무너뜨리면, 대학 입구는 부잣집 자녀들의 전용 엘리베이터가 될 겁니다.[반대 2번]
하지만 그 성채 안에는 이미 균열이 생겼습니다.
수능 만점자 중 70% 이상이 서울·경기 출신이라는 사실, 알고 계시죠?
그건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 결과입니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미래 인재에게 요구하는 역량—비판적 사고, 협업, 윤리적 판단—이 수능으로 측정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 “이 문항 몇 초에 풀었어요?”라고 묻지 않습니다.
시험 속도가 인생의 깊이를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찬성 3번]
그럼 이렇게 물어보죠.
“창의성”을 평가한다면서, 왜 모든 학생이 똑같은 자기소개서 템플릿을 쓰고 있습니까?
왜 면접에서 “제 꿈은 소외된 이웃을 돕는 법조인이 되는 것입니다”라는 대사가 10만 명이 넘게 반복되고 있습니까?
그건 창의성이 아니라 규격화된 가식입니다.
정시는 적어도 거짓말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학생은 있는 그대로, 공부한 만큼 점수를 받습니다.
진실이 공정의 시작점 아닐까요?[반대 3번]
진실은 중요하지만, 단일 진실만을 허용하는 건 전체주의 교육입니다.
우리 사회엔 다양한 재능이 있습니다.
과학 실험실에서 밤을 새는 아이,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동아리장, 가족을 돌보며 공부하는 형제자매—이들은 수능 다섯 과목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정시 확대는 이런 아이들을 ‘비표준 부품’으로 분류하고 버리는 겁니다.
공정은 다양성을 수용하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찬성 4번]
용기라뇨? 지금 수시는 용기 있는 아이들보다 정보 있는 아이들을 뽑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수시가 ‘다양성’을 명분으로 평가의 검은 상자를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어떤 학생이 왜 떨어졌는지, 어떤 기준으로 합격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반면 정시는 누구나 결과를 검증할 수 있습니다.
투명함이 없으면, 다양성은 특혜의 변명이 됩니다.
우리는 공정한 경쟁 위에서만 진짜 다양성이 꽃필 수 있다고 믿습니다.[반대 4번]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공정한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아이가 꿈을 포기해야 하는 사회가 과연 우리가 원하는 미래입니까?
정시는 노력의 결과를 보여줄 수 있지만,
노력을 할 수 있는 조건 자체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공정은 출발선을 평준화하는 것,
아니면 결승선을 다양한 방식으로 열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후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점수가 아니라,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최종 발언
찬성 측 최종 발언
존경하는 심사위원님, 그리고 이 자리를 함께한 모든 한국인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단순한 입시 제도의 문제를 넘어서,
‘누구에게도 열려 있는 기회’가 과연 가능한가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 팀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를 주장해 왔습니다.
정시는 완벽하지 않지만, 가장 덜 불공정한 제도라고요.
반대 측은 “출발선이 다르니 정시는 불공정하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출발선은 다릅니다.
하지만 그 차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정시입니다.
왜냐하면 정시는 부모의 직업, 집 주소, 통장 잔고와 무관하게,
책 한 권과 연필 하나로 승부할 수 있는 마지막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반대 측은 수시를 통해 ‘다양한 재능’을 평가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자기소개서는 컨설팅 회사의 작품이 되고,
봉사활동은 프로그램 패키지로 판매됩니다.
그 ‘다양성’은 돈 많은 아이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키려는 건 이상이 아닙니다.
가난한 시골 학생이 새벽 5시에 일어나 책을 읽고,
그 노력이 점수로 인정받을 수 있는 현실적인 희망입니다.
OECD 사교육비 1위라는 통계를 들며 정시를 비판하셨지만,
그 사교육의 진짜 원흉은 점수 외의 것을 요구하는 수시입니다.
정시는 오히려 사교육의 영향력을 줄이는 유일한 방파제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정은 감성적인 구호가 아닙니다.
공정은 누가 봐도 같은 결과를 내는 제도에서 시작됩니다.
그 제도가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게 정시뿐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인 누구나 책 한 권 들고 시험장에 들어설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신합니다.
정시 모집 비율을 확대하는 것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공정한 길입니다.
반대 측 최종 발언
감사합니다.
찬성 측은 “정시는 책 한 권으로 승부하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책을 살 돈, 그 책을 읽을 시간, 그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선생님—
이 모든 것이 이미 불평등하게 분배된 세상에서,
“책 한 권”은 가난한 아이들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입니다.
우리 팀은 오늘 내내 이렇게 주장해 왔습니다.
진정한 공정은 ‘같은 기준’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여는 것’이라고.
찬성 측은 정시를 ‘투명한 성배’처럼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그 성배 안에는 이미 서울 강남의 사교육 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통계는 말합니다. 수능 상위 10% 중 68%가 수도권 출신이며,
그들 대부분이 월 50만 원 이상 사교육을 받는다고.
이게 공정입니까?
아니면 불평등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편의의 장치입니까?
더 큰 문제는, 정시 확대가 인간을 숫자로 환원한다는 점입니다.
창의성, 공감력, 문제 해결력—
이런 역량은 수능으로 절대 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직 다섯 과목의 점수로
미래의 의사, 교사, 과학자를 가르려 합니다.
이건 교육이 아니라, 분류와 배제의 시스템입니다.
찬성 측은 “수시는 특권층에게 유리하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현재의 수시는 문제가 많습니다.
하지만 해법은 수시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공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보 접근성을 높이고, 지역균형을 강화하고,
평가 기준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방향으로 개선해야 합니다.
공정은 단일 경로가 아닙니다.
공정은 각자가 다른 방식으로 빛날 수 있도록 길을 여는 것입니다.
정시 확대는 그 길을 하나로 몰아넣는 폭력입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미래는,
시험지 위의 점수로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사회입니까?
아니면,
다양한 재능이 존중받고, 다양한 꿈이 실현될 수 있는 사회입니까?
한국인으로서,
우리는 후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호히 말합니다.
대학 입시에서 정시 모집 비율을 확대하는 것은
결코 공정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