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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존엄사)를 법적으로 허용해야 하는가?

안락사(존엄사)를 법적으로 허용해야 하는가?

# 개회 발언

## 찬성 측 개회 발언

존경하는 심사위원님,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묻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말기 암으로 하루하루 극심한 통증 속에 숨을 쉬고 있고, 회복 가능성은 없으며, 오직 고통만이 남아 있다면—그때 당신은 누군가에게 “죽게 내버려 달라”고 말할 권리조차 없어야 할까요?

우리 팀은 분명히 주장합니다. 안락사, 즉 존엄사는 법적으로 허용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자유이며, 고통 없는 죽음은 오히려 진정한 ‘존엄’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자기결정권은 인간 존엄의 핵심입니다.
칸트는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말기 환자를 ‘살려야 할 대상’으로만 보며, 그들의 고통과 의지를 무시합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이미 20년 넘게 안락사를 합법화했고, 그 결과 환자의 삶의 질과 죽음의 질 모두가 향상되었습니다. 이는 선택의 자유가 위험을 낳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성숙을 낳는다는 증거입니다.

둘째,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고통을 연장할 뿐입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연명의료 결정제도’가 있지만, 이는 단지 치료를 중단하는 것일 뿐, 고통을 적극적으로 완화하지 못합니다. 많은 환자들이 “차라리 빨리 죽고 싶다”고 호소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게 진통제조차 제대로 주지 못한 채, ‘살아 있으라’고 강요합니다. 이는 사랑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셋째, 법적 허용은 오히려 오남용을 방지합니다.
반대 측은 “안락사가 남용될 것”이라 우려하지만, 실은 정반대입니다. 법으로 엄격히 규제하고 절차를 투명하게 만들 때, 비공식적이고 위험한 자살이나 방치가 줄어듭니다. 벨기에는 의사 2명 이상의 동의, 정신과 평가, 14일 이상의 숙려 기간 등 철저한 가드레일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허용’이 아니라 ‘관리’를 통해 안전한 선택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문제는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족은 사랑하는 이를 고통 속에 지켜보는 고통을 겪고, 의료진은 윤리적 딜레마에 시달립니다. 존엄사는 그 모든 이들을 위한 해방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토론하는 것은 ‘죽음을 허락할 것인가’가 아니라, ‘삶의 끝에서도 인간답게 살 권리를 인정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은 분명합니다. 법은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존엄을 선택할 용기를 품어야 합니다.


## 반대 측 개회 발언

존경하는 심사위원님, 여러분.
혹시 기억하시나요? 몇 년 전, 한 노인이 “내가 쓸모없어졌으니 죽여 달라”고 말했던 뉴스를. 그 말 뒤엔 자식들의 부양 부담, 사회의 무관심, 고독사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말이 법으로 실행된다면—누가 그 노인을 보호할 수 있을까요?

우리 팀은 단호히 주장합니다. 안락사, 즉 존엄사는 법적으로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조건부가 아닌 절대적 가치이며, 법이 죽음을 ‘선택지’로 만들면 사회 전체의 윤리 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첫째, 생명은 인간 존엄의 전제이지, 선택의 결과가 아닙니다.
존엄사는 이름만 그럴 뿐, 실은 ‘포기’입니다. 고통이 크다고 해서 죽음을 택하는 것이 존엄한가요? 아니면, 그 고통 속에서도 삶을 지키려는 노력이 더 존엄하지 않을까요?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나는 결코 독을 주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의사는 생명을 구하는 자이지, 죽음을 집도하는 자가 아닙니다.

둘째, 사회적 약자가 가장 먼저 희생됩니다.
경제적 어려움, 가족의 부담, 장애나 노쇠—이러한 이유로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압박이 생깁니다. 실제로 네덜란드에서는 초기 정신질환 환자에게 안락사를 시행했다가 국제적 비난을 받았습니다. 한국처럼 복지가 미흡한 사회에서, 안락사는 ‘선택’이 아니라 ‘강요’로 변질됩니다. 누가 “당신은 이제 죽어도 괜찮다”고 말할 권리를 가지겠습니까?

셋째, 의료의 본질이 훼손됩니다.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덜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락사가 합법화되면, 고통 완화 치료보다 ‘빠른 해결책’에 의존하게 됩니다. 실제로 캐나다에서는 안락사 요청 후 진통 펌프를 설치하지 않은 사례도 있습니다. 이는 치료의 포기가 아니라, 의료 시스템의 실패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완벽한 제도’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오류를 범하고, 제도는 언제든 악용될 수 있습니다. 법이 한번 죽음을 허락하면, 그 문은 다시 닫히지 않습니다. 미끄럼틀 효과는 이론이 아니라 역사의 교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합니다.
고통을 덜기 위해 죽음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삶을 지킬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진정한 존엄사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에서 시작됩니다.


# 개회 발언 반박

## 찬성 측 두 번째 발언자 반박

존경하는 심사위원님, 여러분.
반대 측 첫 번째 발언인은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로 시작하셨습니다. “쓸모없어진 노인”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우리에게 안락사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셨죠. 하지만 그 감동 뒤에는 현실을 외면한 이상주의가 숨어 있습니다.

첫째, 반대 측은 “생명은 절대적 가치”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이미 우리 사회는 조건부로 생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연명의료 결정제도’는 환자가 원하면 인공호흡기나 영양주사를 끌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이는 곧 “이 삶은 더 이상 유지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수동적 죽음(치료 중단)은 허용하면서, 능동적 죽음(통증 완화를 위한 약물 투여)은 금지하나요? 같은 결과인데, 한쪽만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 이중잣대입니다.

둘째, “사회적 약자가 희생된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실은 보호주의적 폭력입니다.
노인이나 장애인이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의 선택을 막는 것이 보호일까요? 아니면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이 더 큰 폭력일까요? 네덜란드에서는 안락사 신청자의 80% 이상이 65세 이상 고령자입니다. 그런데도 남용 사례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절차가 엄격하기 때문이지, 사람들이 쉽게 죽음을 선택해서가 아닙니다.

셋째, “의료 본질이 훼손된다”는 우려 역시 현실과 괴리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안락사가 합법화된 국가에서는 완화의료(palliative care)가 더 발전했습니다. 왜냐하면 환자가 안락사를 선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캐나다 사례를 인용하셨지만, 그건 제도 미비 시의 문제이지, 안락사 자체의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제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제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반대 측은 “진정한 존엄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함께 살아간다는 건, 고통 속에서도 억지로 붙잡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함께하는 것입니다.
법은 이상을 강요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패여야 합니다.


## 반대 측 두 번째 발언자 반박

찬성 측 두 분의 발언을 들으며, 한 가지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분들은 죽음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첫째, 찬성 측은 “자기결정권이 존엄의 핵심”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정은 항상 자유롭지 않습니다.
말기 환자가 “죽고 싶다”고 말할 때, 그 뒤엔 통증뿐 아니라 경제적 부담, 가족의 눈치, 사회적 고립이 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도 실제로 “가족에게 폐 끼치기 싫어서” 안락사를 선택한 사례가 보고되었습니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압력입니다. 자기결정권은 정보와 지원, 시간이 있을 때만 성립합니다. 그런데 말기 환자에게 그런 조건이 주어질까요?

둘째, “법적 허용이 오남용을 막는다”는 주장은 역설적입니다.
법이 죽음을 허용하는 순간, 그 죽음은 정상화됩니다. 정상화된 죽음은 점점 더 ‘합리적인 선택’으로 여겨지고, 결국 “왜 안 죽느냐”는 질문이 생깁니다. 벨기에는 이제 정신질환, 자폐성 스펙트럼, 심지어 만성 피로 증후군 환자에게도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건 미끄럼틀이 아니라, 이미 절벽 아래로 떨어진 상태입니다.

셋째, 찬성 측은 “가족과 의료진도 해방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책임의 외주화입니다.
고통 속의 환자를 돌보는 건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책임을 ‘죽음’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나은 간병 시스템, 더 강력한 복지, 더 깊은 공감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찬성 측은 그 모든 노력을 건너뛰고, “차라리 죽이는 게 낫다”고 말합니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포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찬성 측은 칸트를 인용하며 “인간은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수단으로 삼아선 안 됩니다. 그런데 안락사는 어떤가요?
“네가 죽으면 가족도 편하고, 의료비도 절감되고, 병원도 효율적이다” — 이런 논리가 이미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작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법이 한번 죽음을 열어주면, 그 문틈으로 경제 논리와 효율주의가 스며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합니다.
존엄사는 법으로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 길은 어렵지만, 그것이 우리가 인간으로서 걸어야 할 유일한 길입니다.


# 질의응답

## 찬성 측 세 번째 발언자 질의

찬성 3발언자: 반대 측 첫 번째 발언자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귀측은 “생명은 절대적 가치”라며 안락사를 반대하셨습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 법은 말기 환자가 원할 경우 인공호흡기나 영양주사를 끌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의도적으로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 아닙니까?
그렇다면 귀측은 왜 수동적 죽음은 존엄한 선택으로 보시면서, 능동적 죽음—즉 고통을 덜어주는 약물 투여—은 도덕적으로 비난하십니까?

반대 1발언자: 그건 다릅니다. 연명의료 중단은 ‘치료를 멈추는 것’이지, ‘죽음을 유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지 않을 뿐, 적극적으로 끊는 것은 아닙니다. 의도와 결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찬성 3발언자: 감사합니다.
다음으로 반대 측 두 번째 발언자님께 여쭙겠습니다.
귀측은 “안락사 선택은 압력하의 결정일 수 있다”고 우려하셨죠. 그렇다면 제가 묻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엄격한 심사 절차—정신과 평가, 숙려 기간, 제3자 확인—를 통해 그 압력을 걸러낼 수 있다면, 그 선택은 여전히 ‘비자발적’이라고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귀측은 어떤 조건에서도 인간의 자기결정을 신뢰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반대 2발언자: 절차가 아무리 엄격해도, 사회적 압력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복지가 부족한 한국에서는 “내가 죽는 게 가족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듭니다. 우리는 그 무형의 압력을 제도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찬성 3발언자: 마지막으로, 반대 측 네 번째 발언자님께 드릴 질문입니다.
만약 귀하의 부모님이 말기 암으로 매일 통증에 울부짖으며 “차라리 죽여 달라”고 간청하신다면—그리고 모든 절차를 충족하셨다면—법이 그 마지막 소원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반대 4발언자: …그 상황은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법은 감정이 아니라 원칙 위에 서야 합니다. 만약 예외를 허용하면, 그 예외가 규칙이 됩니다. 저는 그 문을 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찬성 측 질의 요약

반대 측은 ‘생명 절대주의’를 고수하지만, 이미 우리 사회는 조건부 죽음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자기결정을 근본적으로 불신하며, 어떠한 제도적 보완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가족의 고통 앞에서도 “원칙”을 우선시하며 현실적 배려를 거부한 점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균형을 상실한 이상주의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 반대 측 세 번째 발언자 질의

반대 3발언자: 찬성 측 첫 번째 발언자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귀측은 칸트를 인용하며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안락사는 결국 “고통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 죽음을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귀측의 주장은 칸트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공리주의—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더 가깝지 않습니까?

찬성 1발언자: 아닙니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을 존중하라고 했습니다. 자기 삶의 끝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그것이 바로 이성적 주체로서의 존엄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권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반대 3발언자: 흥미로운 해석이네요.
다음으로 찬성 측 두 번째 발언자님께 여쭙겠습니다.
귀측은 네덜란드 사례를 근거로 “안락사가 남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런데 2023년 벨기에는 자폐 성인에게 안락사를 시행했고, 네덜란드는 만성 우울증 환자에게도 허용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고도 귀측은 여전히 “미끄럼틀 효과는 없다”고 단언하실 수 있습니까?

찬성 2발언자: 그 사례들은 엄격한 기준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중요한 건 ‘허용 여부’가 아니라 ‘관리 여부’입니다. 우리는 그 사례들을 반면교사 삼아, 정신질환자는 제외하자는 조건을 법에 명시할 수 있습니다. 제도는 정지된 것이 아니라, 개선될 수 있습니다.

반대 3발언자: 마지막으로, 찬성 측 네 번째 발언자님께 드릴 질문입니다.
진통제와 완화의료가 충분히 제공된다면, 환자는 안락사를 원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왜 귀측은 의료 시스템 개선보다 ‘죽음의 합법화’를 먼저 선택하려 하십니까? 이는 마치 집이 추우니 난로를 고치는 대신, 차라리 밖에서 얼어 죽자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찬성 4발언자: 좋은 비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환자는 진통제로도 통증을 완화할 수 없습니다. 완화의료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넘은 이들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비인간적입니다. 우리는 난로를 고치는 동시에, 얼어 죽을 위험에 처한 이에게 마지막 선택권을 줘야 합니다.

### 반대 측 질의 요약

찬성 측은 칸트 철학을 자기 편의적으로 해석하며, 실은 공리주의적 사고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네덜란드·벨기에의 확대 적용 사례를 “개선 가능”이라며 경시하는 태도는, 제도 운영의 장기적 리스크를 간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의료 시스템의 근본적 개선을 외면한 채, 죽음을 ‘빠른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선택으로 전가하는 책임 회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 자유 토론

찬성 측 3번 발언자:
방금 반대 측은 “사회적 압력 때문에 안락사를 허용하면 안 된다”고 하셨죠? 그런데 한 가지 묻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말기 환자가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도록 법으로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 결정 뒤에도 가족의 눈치, 경제적 부담, 고립감—똑같은 압력이 존재하죠. 그런데 왜 그건 괜찮고, 고통을 덜어주는 주사 한 방은 위험하다는 겁니까?
이건 모순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편의적 도덕주의입니다.
“죽음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면 안 된다”는 원칙이 있다면, 그 원칙은 연명치료 중단에도 적용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원칙이 아니라 편안함을 위한 변명일 뿐이에요.


반대 측 3번 발언자:
좋습니다. 그럼 제가 찬성 측께 여쭤보죠.
당신들이 말하는 “철저한 절차” 속에서, 정신질환 환자도 포함됩니까? 우울증으로 인해 “삶이 끝났다”고 느끼는 청년도 자격이 있습니까?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폐 성인에게도 안락사를 시행했어요. 그런데 찬성 측은 “절차만 잘 만들면 된다”고 하시죠?
그럼 결국 모든 고통—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죽을 이유’가 되는 겁니다.
이건 미끄럼틀이 아니라, 이미 경사로 끝에서 떨어지는 중입니다.
혹시… 당신이 만약 우울증에 걸렸을 때, 의사가 “약보다 안락사 어때요?”라고 제안한다면, 그게 진짜 선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찬성 측 4번 발언자:
재미있는 질문이네요. 그런데 반대 측은 계속 극단적 사례만 들고 계세요.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안락사 신청자의 97%는 말기 암, ALS, 심부전 같은 치명적 질환을 가진 분들입니다. 정신질환은 전체의 0.5% 미만이고, 그마저도 10년 넘게 숙고 끝에 최근 일부 허용된 거예요.
오히려 우리가 무시하고 있는 현실이 있습니다.
지난해 한국에서 말기 암 환자 3명 중 1명이 “차라리 죽고 싶다”고 호소했지만, 누구도 그들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습니다.
진통제 대신 기도만 주는 게 우리 사회의 ‘존엄’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답게 고통 없이 떠날 수 있도록 법이 용기를 내는 것이 진짜 존엄이 아닐까요?
참고로, 기도는 좋지만… 진통제는 더 좋습니다.


반대 측 4번 발언자:
“기도보다 진통제”라는 말, 참 매력적이네요. 하지만 그 진통제가 죽음의 주사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우리는 지금 단지 ‘약’을 주는 게 아니라, 의사가 죽음을 실행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겁니다.
더 중요한 건, 한국은 네덜란드가 아닙니다.
우리에겐 가족 부양 부담이 크고, 노인 빈곤율은 OECD 1위이며, 완화의료 접근성은 형편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권”을 준다는 건, 사실상 가난한 사람에게 ‘죽는 게 낫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과 다름없어요.
법이 열어준 문은, 결국 복지가 닫아놓은 문 틈새로 새어나온 절망을 정당화하는 장치가 됩니다.
진정한 존엄은, “어떻게 죽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살다 갈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할 때만 태어납니다.
그 고민을 건너뛰고, 죽음을 합법화하는 건—
사회가 책임을 포기한 순간입니다.


# 최종 발언

## 찬성 측 최종 발언

존경하는 심사위원님,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말기 질환으로 하루 20시간 이상 고통에 신음하며, 눈물로 “제발 끝내줘”라고 속삭인다면—그때 우리는 여전히 “법이 금지했으니 참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주장해 왔습니다. 안락사는 죽음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없는 죽음을 향한 인간의 마지막 자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첫째, 자기결정권은 인간 존엄의 근간입니다. 칸트가 말했듯,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법은 환자의 의지를 무시한 채, 오직 ‘살려야 한다’는 집착만을 강요합니다.
둘째, 현재의 연명의료 중단 제도는 모순입니다. 인공호흡기를 끄는 것은 허용하면서, 고통을 덜어주는 주사를 금지하는 건, 마치 “굶어 죽는 건 괜찮지만, 독은 주지 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셋째,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20년 넘게 엄격한 절차 아래 안락사를 시행하며, 오히려 완화의료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는 허용이 남용을 낳는 게 아니라, 책임을 낳는다는 증거입니다.

반대 측은 “사회적 약자가 위험하다”고 우려했습니다. 하지만 그 우려는 보호라는 이름의 억압이 될 수 있습니다. 노인이나 장애인이 “죽고 싶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절차를 통해 진정한 선택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진정한 위험은 법이 없어 생기는 게 아니라, 법이 없어서 비공식적이고 위험한 자살이 만연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토론하는 건 단지 법조문 하나가 아닙니다.
이는 한국 사회가 고통 속의 인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삶의 끝에서도 인간답게 살 권리를 인정할 것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신합니다.
존엄사는 허용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끝내주는 것이 가장 깊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 반대 측 최종 발언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의 노부모가 “내가 죽으면 자식들 부담이 줄겠지”라며 안락사를 요청합니다.
법은 그 요청을 ‘자율적 선택’이라며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 뒤엔 가족의 침묵, 복지의 부재, 사회의 무관심이 있습니다.
이게 정말 존엄한 죽음입니까? 아니면 구조적 폭력의 결과입니까?

우리는 일관되게 주장해 왔습니다. 안락사는 법으로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조건부가 아닌 절대적 가치이며, 법이 죽음을 ‘선택지’로 만들면, 그 문은 다시 닫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 생명의 존엄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에서 시작됩니다.
둘째, 한국은 복지 사각지대가 너무 많습니다. 노인 빈곤율 40%를 넘는 나라에서 “선택권”은 곧 가난한 이들에게 ‘죽는 게 낫다’는 메시지가 됩니다.
셋째, 의료의 본질은 치유입니다. 그런데 안락사가 합법화되면, 고통 완화보다 ‘빠른 해결’이 우선시됩니다. 캐나다에서 이미 그런 사례가 발생했습니다.

찬성 측은 “절차로 통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제도는 언제든 악용됩니다.
벨기에는 이제 정신질환자에게도 안락사를 허용합니다. 이건 미끄럼틀이 아니라, 절벽 아래로 떨어진 후의 변명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죽음을 합법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은 복지, 더 따뜻한 간병, 더 깊은 공감을 만드는 것입니다.
고통 속의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네 삶은 가치 있다”고 말해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존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호소합니다.
법은 죽음을 열어주지 말고, 삶을 지켜주는 방패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통 속에서도 함께 살아갈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