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제도를 유지하거나 재도입해야 하는가?
개회 발언
찬성 측 개회 발언
존경하는 심사위원님, 그리고 오늘 이 자리를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팀은 사형 제도를 유지하거나 재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극악무도한 범죄 앞에서 사회가 정의를 포기한다면, 그 사회는 곧 정의를 잃은 무법지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첫째, 응보적 정의의 실현입니다. 살인, 테러, 아동 성폭행 등 인간성 자체를 부정하는 범죄는 단순한 ‘오해’나 ‘사회적 소외’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런 범죄는 피해자의 삶을 영원히 끊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가해자에게 평생 교도소에서 세금으로 봉양받는 ‘안락한 죽음’이 정의일까요? 아닙니다. 진정한 정의는 “눈에는 눈”이 아니라, 비례적 책임의 회복입니다. 사형은 그 마지막 보루입니다.
둘째, 사회적 억제 효과와 재범 방지입니다. 통계는 다양하지만, 미국 일부 주나 일본, 싱가포르처럼 사형 제도를 엄격히 적용하는 국가에서는 중대 범죄 발생률이 현저히 낮다는 연구들이 존재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형 집행된 범죄자는 절대 다시는 누군가를 해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종신형도 탈옥 가능성이 있고, 사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형은 그 위험을 완전히 차단합니다.
셋째, 피해자 가족의 정서적 회복입니다. “가해자는 인권이 있는데 왜 범죄 피해자의 인권은 고려되지 않나요?”라는 질문을 자주 듣습니다. 피해자 가족은 평생 상처 속에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사형 판결은 ‘복수’가 아니라, 사회가 그들의 고통을 인정했다는 증표입니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법 오류를 이유로 사형을 거부하는 주장에 대해선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오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지, 정의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DNA 감식, 공판 중심주의, 상고 절차 강화 등 기술과 제도는 이미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완벽을 기다리다 보면 정의는 늘 늦게 옵니다.
따라서 우리 팀은, 사형 제도는 인간 존엄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극악 범죄로부터 인간 존엄을 지키는 최후의 방패라고 믿습니다.
반대 측 개회 발언
감사합니다, 심사위원님.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 팀은 사형 제도를 유지하거나 재도입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사형은 국가가 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며, 이는 문명 사회의 기본 원칙을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생명권은 절대적이며 회복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사형은 한 번 집행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사형 선고 후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가 190건 이상입니다. 한국에서도 조두순 사건 이후 사법 시스템의 오류 가능성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실수로 한 사람의 목숨을 끊었다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합니까? 국가입니까? 국민입니까? 그 어떤 보상도 죽은 생명을 되살릴 수 없습니다.
둘째, 사형은 범죄 억제 효과가 없다는 실증적 증거입니다. 유엔은 2014년 이후 여러 차례 보고서를 통해 “사형 제도와 범죄율 사이에 명확한 상관관계는 없다”고 밝혔습니다. 오히려 노르웨이, 독일, 캐나다처럼 사형을 폐지한 국가들이 더 낮은 살인율과 더 높은 사회 신뢰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범죄는 처벌의 ‘잔혹함’이 아니라, 처벌의 ‘확실성’과 ‘공정성’ 에 의해 억제됩니다.
셋째, 사형은 국가의 도덕적 권위를 스스로 훼손한다는 점입니다. “살인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살인자를 죽이겠다”는 논리는 자기모순입니다. 국가가 폭력을 정당화할 때, 그 폭력은 언젠가 우리 모두를 향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증명합니다. 나치 독일도, 군사정권 시절의 한국도, ‘국가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문명은 복수에서 용서로, 처벌에서 치유로 나아가는 길 위에 서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형은 피해자 가족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복수는 고통을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연장시킵니다. 진짜 치유는 가해자의 반성, 사회의 공감, 그리고 예방 시스템의 강화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 팀은, 사형 제도는 정의가 아니라, 절망의 잔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피로 피를 씻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개회 발언 반박
찬성 측 두 번째 발언자 반박
감사합니다. 방금 반대 측은 감동적인 어조로 “사형은 문명의 퇴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세 가지 근본적 오류 위에 세워졌습니다.
첫째, 사법 오류를 절대화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190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했죠? 맞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지난 50년간 약 1,500명에게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즉, 오류율은 12% 미만입니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1980~90년대, DNA 감식도 없던 시절의 사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CCTV, 디지털 증거, 전문가 증인, 삼심제, 특별상고까지 갖췄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한 명의 오심도 용납될 수 없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의 자체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오류를 최소화하는 제도를 완비할 것인가? 반대 측은 후자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상을 위해 현실의 정의를 희생하려 합니다.
둘째, 범죄 억제 효과를 완전히 부정하는 태도는 비과학적입니다.
유엔 보고서는 “사형과 범죄율 사이에 명확한 상관관계가 없다”고 했습니다. ‘없다’가 아니라 ‘명확하지 않다’입니다. 이는 오히려 맥락에 따라 효과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는 마약 밀매에 사형을 적용한 이후 밀매 조직이 아예 진입을 포기했습니다. 일본은 살인 사건 발생률이 OECD 평균의 1/5 수준입니다. 이 모든 것을 “문화 탓”으로 치부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셋째, 국가의 도덕적 권위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사람을 죽이면 폭력이 정당화된다”고 했지만, 이는 개념의 전도입니다. 국가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법원이 국민의 이름으로 정의를 집행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모순이라면, 경찰이 강도를 제압할 때 총을 쏘는 것도 모순이겠죠? 군인이 침략자를 저지할 때도요?
우리는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극악무도한 폭력에 대해 사회 전체가 책임을 묻는 것을 정당화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피해자 가족의 고통을 “복수”로 치부한 것은 큰 오해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가해자의 죽음이 아니라, ‘내 아이의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느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사형 판결은 그들에게 “네 고통은 중요하다”는 사회의 선언입니다.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비인간적입니다.
반대 측 두 번째 발언자 반박
감사합니다. 찬성 측은 “사형은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는 정의는 과거의 유물이며, 현대 사회의 가치와 충돌합니다.
첫째, 응보적 정의는 이미 시대착오입니다.
“눈에는 눈”은 고대 바빌론의 법전에서 나온 사고방식입니다. 오늘날 형사 사법의 목표는 재활, 예방, 사회 복귀입니다. 유럽연합은 사형 제도를 인권 침해로 규정해 가입 조건으로 삼았고, 전 세계 170개국 이상이 사형을 폐지하거나 사실상 중단했습니다. 한국도 1997년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찬성 측은 21세기에 “비례적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주도의 사적 복수를 정당화하려 합니다.
둘째, 억제 효과는 통계적 환상에 불과합니다.
싱가포르나 일본의 낮은 범죄율은 사형 때문이 아니라, 높은 사회 신뢰, 교육 수준, 경찰 접근성, 소득 평등 등 복합적 요인에서 비롯됩니다. 실제로, 미국 내에서도 사형 제도가 있는 주와 없는 주의 살인율 차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형이 있는 주 중 일부는 살인율이 더 높습니다.
이처럼 찬성 측은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셋째, 피해자 가족의 정서를 제도화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모든 피해자 가족이 사형을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조두순 사건 피해자 가족은 “사형보다는 평생 격리”를 요청했고, 세월호 유가족 중 다수는 “복수보다 진실 규명”을 요구했습니다.
일부의 감정을 전체의 법으로 만드는 것은 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합니다. 법은 감정의 파도 위에 세워져선 안 됩니다. 이성의 둑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찬성 측은 “기술이 발전했으니 오류 걱정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2023년에도 서울고법은 10년간 유지된 유죄 판결을 무죄로 뒤집었습니다. 증거 조작, 증언 강요, 편향된 수사—이 모든 것은 기술로 해결되지 않는 인간의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됩니다.
한 번의 오심은 단지 ‘통계 오차’가 아니라, 한 인간의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는 정말 사형이 필요한가요?
우리는 정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더 현명하고 더 인간적인 정의를 선택할 뿐입니다.
질의응답
찬성 측 세 번째 발언자 질의
질의 내용 및 답변
찬성 측 3번:
“반대 측 1번 발언자님께 묻겠습니다. 귀측은 ‘사형은 되돌릴 수 없으므로 절대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종신형도 마찬가집니까? 한번 감옥에 갇힌 인생 역시 되돌릴 수 없고, 오심으로 평생을 감옥에서 보낸 사례도 존재합니다. 그런데도 종신형은 유지하면서, 오직 사형만을 ‘불가역적’이라며 배제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는 이중잣수가 아닙니까?”
반대 측 1번:
“좋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종신형은 오심이 밝혀졌을 때 석방과 보상이 가능합니다. 반면 사형은 생명을 끊는 행위로, 그 어떤 보상도 죽음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완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 가능성이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찬성 측 3번:
“반대 측 2번 발언자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귀측은 ‘노르웨이, 독일은 사형 없이도 낮은 범죄율을 유지한다’고 하셨죠. 하지만 이들 국가는 인구 규모, 사회 신뢰도, 복지 수준, 문화적 동질성 등에서 한국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런 맥락을 무시한 채 단순히 ‘사형 없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사막에서 우산을 팔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열대우림에서도 우산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오류 아닙니까?”
반대 측 2번:
“그러나 범죄 억제의 핵심은 처벌의 ‘잔혹함’이 아니라 ‘확실성’입니다. 한국도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지 20년 넘었지만, 살인율은 OECD 평균보다 낮습니다. 오히려 사형 집행률이 높은 미국 일부 주는 살인율도 높습니다. 따라서 맥락을 고려하더라도, 사형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찬성 측 3번:
“마지막으로 반대 측 4번 발언자님께 묻겠습니다. 귀측은 ‘복수는 치유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귀하의 자녀가 잔혹하게 살해되고, 가해자가 교도소에서 건강보험 혜택을 받으며 TV를 보고 있다면, 그 상황에서 국가가 ‘용서와 치유’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피해자 가족에게 또 다른 폭력이 되지 않겠습니까? 법은 감정을 배제해야 하지만, 인간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반대 측 4번:
“물론 피해자 가족의 고통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법은 다수의 감정이 아니라 보편적 원칙 위에 서야 합니다. 한 사람의 복수를 위해 국가가 또 다른 생명을 끊는다면, 우리는 고통의 연쇄를 끊지 못합니다. 진정한 책임은 가해자의 평생 반성과 사회적 격리 속에서 이루어져야지, 단지 목숨을 끊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찬성 측 질의 요약
감사합니다. 반대 측의 답변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모순이 드러납니다.
첫째, 오심 가능성을 이유로 사형만을 특별히 배제하면서도, 종신형의 비가역성은 인정하지 않는 이중잣대가 있습니다.
둘째, 국제 사례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면서도, 한국의 현실적 범죄 구조와 국민 정서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셋째, 피해자 가족의 고통을 ‘감정’으로 치부하며 법의 인간적 차원을 배제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정의를 추상화하는 데 그칩니다.
이처럼 반대 측은 이상적인 윤리를 주장하지만, 현실의 정의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반대 측 세 번째 발언자 질의
질의 내용 및 답변
반대 측 3번:
“찬성 측 1번 발언자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귀측은 ‘DNA 감식과 삼심제로 사법 오류를 거의 제로에 가깝게 줄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2023년 대검찰청 보고서에 따르면, 디지털 증거의 17%는 조작 가능성이 있으며, 증언의 30%는 기억 왜곡으로 인해 신뢰도가 낮다고 나와 있습니다. 기술이 인간의 편견과 오만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거의 제로’라는 표현은 위험한 과신 아닙니까?”
찬성 측 1번:
“물론 기술이 만능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이 아니라 ‘최선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사형 사건은 일반 사건보다 훨씬 더 엄격한 증거 기준과 심리 절차를 거칩니다. 위험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면 정의를 포기해야 하는가? 오히려 더 정밀한 시스템을 통해 책임 있는 사형 집행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반대 측 3번:
“찬성 측 2번 발언자님께 묻겠습니다. 귀측은 ‘사형은 국가의 폭력이 아니라 법원의 정의 집행’이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법원이 내린 명령이라면 국가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당화됩니까? 만약 그렇다면, 나치 독일의 법원도 ‘합법적으로’ 수백만 명을 죽였습니다. 법이 항상 정의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권력의 도구가 될 수도 있는가? 이 경계를 어떻게 지키시겠습니까?”
찬성 측 2번:
“그것은 사형 제도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전체 법치 시스템에 대한 비판입니다. 오늘날 한국은 헌법재판소, 언론 자유, 시민사회 감시 등 다층적 견제 장치를 갖추고 있습니다. 과거 전체주의와 현대 민주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오류입니다. 사형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를 운영하는 민주적 성숙도의 문제입니다.”
반대 측 3번:
“마지막으로 찬성 측 4번 발언자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귀측은 ‘싱가포르와 일본에서 사형이 범죄 억제에 효과적이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마약 소지 15g만으로도 사형이 집행되며, 일본은 사형수에게 30년간 사형 집행을 미루는 ‘심리적 고문’을 자행합니다. 이런 인권 침해적 관행까지 수용해야 사형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과연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까?
찬성 측 4번:
“우리는 싱가포르나 일본의 모든 제도를 수용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엄정한 사법 집행이 범죄 억제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한국은 국제 인권 기준을 충족하면서도, 극악 범죄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사형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전부 또는 무’로 보는 이분법은 현실 개혁을 가로막습니다.”
반대 측 질의 요약
감사합니다. 찬성 측의 답변에서 세 가지 핵심 문제를 확인했습니다.
첫째, 기술 낙관주의에 빠져 인간적 오류와 제도적 편향을 과소평가하고 있습니다.
둘째,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사형이 안전하다’는 주장은 역사적 교훈을 망각한 것입니다. 법은 언제든 권력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외국 사례를 부분적으로만 인용하며, 그 부작용과 인권 침해는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있습니다.
결국 찬성 측은 ‘정의’라는 이름 아래, 위험을 정당화하고, 고통을 계량화하며, 생명을 조건부로만 존중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문명은, 아무리 악마라 해도 그 생명을 끊지 않겠다는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자유 토론
(찬성 측 1번)
“반대 측은 ‘사형은 되돌릴 수 없다’고 말하지만, 종신형도 마찬가집니다. 탈옥한 살인마가 또 아이를 죽였을 때, 그 책임은 누가 집니까? 사형만 ‘비가역적’이라며 특별 대우하는 건 이중잣대 아닙니까?”
(반대 측 1번)
“그렇다면 찬성 측은 ‘완벽한 사법’을 전제로 하고 계시네요. 그런데 조두순이 12년밖에 안 산 것도, 정확한 증거가 있었음에도 판결이 왜곡된 결과입니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져도, 인간이 판단하는 순간 오류는 필연입니다.”
(찬성 측 2번)
“흥미롭군요. 반대 측은 ‘오류 가능성’ 하나로 정의 전체를 포기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경찰도, 재판도, 구속도 모두 폐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그것들도 모두 오류 가능성을 내포하니까요.”
(반대 측 2번)
“아니요. 우리는 생명을 끊는 ‘최후의 수단’만 거부합니다. 경찰이나 구속은 회복 가능하지만, 사형은 아닙니다. 게다가 싱가포르 사례를 들며 억제 효과를 말하시는데, 그 나라에서는 마약 소지만으로도 사형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할 ‘문명’입니까?”
(찬성 측 3번)
“반대 측은 외국 사례를 선택적으로 인용하시네요.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이며, 사형 집행은 엄격한 삼심제와 국민참여재판을 거칩니다. 그리고 피해자 가족이 ‘왜 우리 고통은 법 앞에서 무시되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어떤 답을 해야 합니까? ‘너희 감정은 법과 무관하다’고 말해야 합니까?”
(반대 측 3번)
“법은 감정을 배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수의 분노가 소수를 죽이는 도구가 됩니다. 나치도 ‘국민의 정의감’을 내세워 유대인을 죽였습니다. 민주주의도, 법도, 절대 권위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도 죽이지 않는’ 원칙이 필요합니다.”
(찬성 측 4번)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만약 당신의 자녀가 잔혹하게 살해되고, 가해자가 교도소에서 유튜브 채널까지 운영하며 인기를 끈다면—그때도 ‘국가는 결코 죽일 수 없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법이 인간의 고통을 외면할 때, 그 법은 더 이상 정의가 아닙니다.”
(반대 측 4번)
“그런 가정은 감정을 자극하지만, 정책은 예외가 아닌 일반을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가 사형을 유지하면, 언젠가 무고한 한국인이 그 제도의 희생양이 될 수 있습니다. 진짜 용기는 복수를 참는 데 있고, 진짜 문명은 악마조차 살려두는 데 있습니다.”
최종 발언
찬성 측 최종 발언
심사위원님, 오늘 우리는 단순한 법조문의 해석을 넘어, 한국인이 정의를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답해 왔습니다.
우리 팀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주장해 왔습니다.
극악 범죄 앞에서 침묵하는 법은 정의가 아니며, 피해자의 고통을 ‘감정’이라 치부하는 사회는 공감을 잃은 사회입니다.
반대 측은 “사형은 오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모든 인간의 판단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오류를 줄이기 위해 삼심제를 강화하고, 디지털 증거를 도입하며, 공판 중심주의를 정착시켜 왔습니다.
완벽을 기다리다 보면, 정의는 늘 늦게 옵니다.
그리고 그 ‘늦음’은 피해자 가족에게는 평생의 상처로 남습니다.
또 반대 측은 “노르웨이처럼 사형 없이도 범죄를 억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노르웨이는 인구 500만의 동질적 사회입니다. 한국은 5천만 인구에 급변하는 도시 구조, 높은 스트레스, 그리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성범죄와 조직폭력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이상을 모방할 수는 있지만, 우리 국민의 고통은 대리로 느낄 수 없습니다.
사형은 복수가 아닙니다.
사형은 국가가 피해자의 이름을 기억하겠다고 다짐하는 최후의 서약입니다.
사형은 가해자가 다시는 누군가를 해칠 수 없다는 사회적 보호막입니다.
사형은 법이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선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신합니다.
사형 제도는 인간 존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극악 범죄로부터 그것을 지키는 마지막 방패입니다.
한국인이라면, 이 정의를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감사합니다.
반대 측 최종 발언
존경하는 심사위원님, 오늘의 토론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우리가 악을 멈추기 위해, 스스로 악이 되어도 괜찮은가?”
우리 팀은 분명히 답합니다. 아니요. 절대 안 됩니다.
찬성 측은 “기술이 발전했으니 오류는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거의 없다’는 말은 ‘없다’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무고한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그건 통계가 아니라 한 가족의 세상이 무너지는 비극입니다.
기술은 인간의 오만을 막지 못합니다. 기억은 왜곡되고, 증거는 조작되며, 판사는 때로 편견에 눈이 멀기도 합니다.
법은 완벽할 수 없기에, 되돌릴 수 없는 처벌은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또 찬성 측은 “피해자 가족의 고통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물론입니다. 그 고통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법은 감정을 일반화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은 다수의 복수심이 아니라, 소수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복수는 고통을 끝내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다음 세대로 물려줄 뿐입니다.
사형은 고대의 유물입니다.
문명은 ‘눈에는 눈’에서 ‘치유와 회복’으로 진화해 왔습니다.
노르웨이는 브레이비크 테러 이후에도 가해자를 종신형으로 수용했고, 그 선택은 오히려 국민의 신뢰와 사회 통합을 강화했습니다.
진짜 강한 사회는 악마를 죽이지 않고, 그를 감시하며 스스로의 윤리를 지키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무고한 자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사형을 거부할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의이고, 진보된 문명입니다.
감사합니다.